집에서 개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중대한 사실 하나가 있다. 별로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먹이를 주는 주인과 예뻐만 해 주는 주인 사이에 분명하고도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먹이 주는 주인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이기 때문에 주인의 작은 야단에도 복종의 표시로 발랑 몸을 뒤집는다. 그러나 예뻐만 해 주는 주인은 마음에 안 들면 이따금 물기도 한다. 최근 우리의 가정 내에서도 이 '먹이'의 주권자가 분명 보이지 않는 권력을 쥐고 가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다소 엉뚱한 발상인지 모르지만 근래에 아내가 해 주는 밥이나 얻어먹으며 무위도식하는 나이든 남자들의 문제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조기 은퇴라는 사회적 시류와 고령화 사회로의 급속한 변화가 한 때 부부 관계에서 서슬 퍼렇던 남자들의 권력을 추락시키고 있다. 생산의 주권이 곧 권력인 점을 감안해 보면 일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권력의 상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부장의 권위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지고 아내들의 권세 앞에 쩔쩔 매는 형국으로 부부 관계가 역전되는 시기도 이때쯤이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우리의 남자들이 갑작스럽게 높아진 아내의 위세의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권력의 역전 현상 앞에 당황만 하고 자신의 위상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날로 심해지는 아이들의 무관심과 아내들의 은근한 압박에 살기 힘든 남자들은 그들끼리 모여 이구동성 '여자들이 문제'라며 아우성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하자는 결혼식장의 맹세는 남편만의 화려했던 봄날의 추억이 된 지 오래다. 부부 싸움을 해도 자식들은 으레 어머니 편이고 부엌을 장악한 어머니가 파업을 선언하면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다 이내 굶기 일쑤다. 차라리 항복하며 온순하게 몸을 보존하는 쪽이 낫다는 것이 남편들의 생각인데, 그들의 결론은 여전히 '아무튼 말세'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모르긴 해도 오늘날 무기력한 가장과 남자 노인들의 수난은 그들이 자초했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하다. 우선 나이 든 남자들은 두 가지의 중대한 문제를 그냥 지나치고 살아왔다. 첫째는 가정에서 권력이 나오는 중유한 거점인 '부엌'을 너무 하찮게 여겨왔다는 점이다. 남편들이 일터로 간 사이 아내들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아이들과 남편의 입맛을 자신들의 뜻대로 길들여 왔다. 엄마의 입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또 하나의 세상으로 자라나면서 아내의 권력이 배가된다는 사실을 남편들은 알았어야 했다. 부엌의 주권을 쥔 아내의 파업에서 오는 고통을 미리부터 대비해 두지 못한 남자들의 준비 부족도 문제이다. 권력 없는 남편이 아내의 태업과 파업에 꼼짝 못하고 항복해 버린 사연도 사실은 요리를 통해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는 부엌의 권력 앞에 무릎 굻은 결과인 것이다.
두 번째는 또 하나의 권력을 키우는 요람을 우습게 봤다는 점이다. 육아같은 하찮은 일은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남편들은 미래의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회당한다. 정년 퇴직 후 급격히 추락한 남자들의 구겨진 위상에 엄마의 요람에서만 키워진 아이들이 한몫하고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몰랐던 거시다.
바야흐로 남자들의 수난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그 수난의 이유와 배경을 알고 미리 준비하면 노후를 드센 여자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갈 방법이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이미 나이 든 남잗3ㅡㄹ은 요람을 흔들 시기는 놓쳤지만 이제부터라도 '요리'를 배워 젊은 날 어쩔 수 없이 여자들에게 빼앗겼던 부엌을 탈환할 기회를 엿봐야 한다. 그러나 아내의 권력을 더욱 강화해 주는 미련스러운 설거지는 안 된다. 오직 '요리'를 해야만 한다. '요리'를 통해서 남자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을 수 있고, 가정의 화목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남의 집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아니고 우리집에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랄까. 적어도 어느 부분은.
먼저 엄마에게 말해봤다.
난 이 지문을 읽고 충격을 먹기도 했고 고소하기도 했고 그럴 듯 하기도 했다. 믿을만한 것 같기도 했고 어째 믿을 수 없기도 했던 지문이었다.
라며.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 대신 음식을 했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입맛에 길들여져 아버지 음식만 먹으면 구토할 것 같다고 했다.(그녀가 워낙 특이한 체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이런 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가정의 풍토도, 우리들의 생각도.
나는 아버지와 잘 맞을 땐 정말 잘 맞지만 한 번 틀어지면 끝장을 보는(...) 쪽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타입이었지만, 이 글을 꼭 아버지께 보여주고 싶었다고나 할까.
결국 오랜만에 언어 비문학 지문을 몇 개 다 맞은 것(...)도 이 탓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