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商)과 하(夏)의 발굴
1920년 무렵에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삼대(三代), 즉 하(夏), 상(商), 주(周)왕조 가운데 오직 주왕조만이 직접적으로 자체적인 역사기록을 통해서 알려져 있었다. 상왕조 때의 30명의 왕이나, 일곱 번이나 바뀐 수도는 주왕조 시절 혹은 그 직후에 편찬된 연대기에 수록되어 있었다. 여러 세기 가 지난 후 송대(宋代)의 금석학자들은 일부에 명문(銘文)이 새겨진 상대(商代)의 청동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899년이 되어서야 학자들은 중국의 한약방에서 고대문자가 새겨진 "용골(龍骨)"을 추적하여 그것들이 하남성 황하 북쪽에 있는 안양(安陽) 부근에서 출토되었음을 확인했다. 1928년에 국립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은 안양에서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에 대한 과학적인 발굴작업을 시작했으며, 이 작업은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50년 이후 초기 상왕조의 수도가 현재의 정주로 밝혀졌다.
상나라 수도의 성 내부에는 흙으로 다진 기단 위에 기둥과 대들보를 세워 지은 왕궁과 지배층의 거주지가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북경 자금성의 기본적인 건축양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안양에서는 수많은 석주를 가진, 시멘트만큼 단단하게 흙으로 다진 건물의 기초가 53개나 발견되었다. 근처에 있는 지하 갱은 창고와 작업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배귀족들은 청동기 주조, 토기제작 및 다른 수공업에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수공업자들을 부리고 있었다. 장인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상대의 청동기는 지금까지도 인류의 위대한 예술적 업적의 하나로 남아 있다. 상왕은 문자를 다루고 갑골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정인(貞人)들의 보좌를 받았다(동물의 어깨뼈에 구멍을 뚫고 열을 가해서 균열을 만든 다음, 조상신의 도움으로 이 균열을 해석하고 그 결과를 뼈에 새겨넣는 식이었다). 이렇게 하여 안양에서 최초로 발견된 저 유명한 "갑골문(卜辭)"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대략 10만 개 가량의 갑골문이 수집되었다. 갑골문에 새겨진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보면 상의 지배귀족들은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나가 싸우기도 하고, 운동을 위해서 사냥을 즐기기도 하고, 제사와 의례를 주관하기도 하는 한편, 기록자(즉 史를 말한다/역자 주)와 장인들을 거느리고서 반수혈식 주거지에 사는 주변 농민들이 경작하는 농작물을 공납받아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상대 사회는 이미 고도로 계층분화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 아래서 물소는 중요한 가축이었으므로 이 수많은 소들이 갑골문을 위한 뼈를 지속적으로 공급했을 것이고, 동물들은 수백마리씩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통치자는 조상신에 대한 숭배를 완전히 의례화된 종교의식의 형태로 표현했다. 지하의 종묘에는 귀중한 물품, 수많은 동물과 인간이 희생으로 매장되었다. 장광직은 이러한 매장풍습을 통해서 은 사회가 하층민들을 때때로 제사의 희생물로 바치는 계층화된 사회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결론지었다. 안양에서 발굴된 유적은 수도 주변의 드넓은 지역 가운데 다만 왕궁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불과할 것이다. 수많은 상대의 유적들이 또한 화북과 사천성 등 다른 지역에서도 발굴되었다.
상왕의 권력은 토목공사를 위한 방대한 노동력의 동원에서도 역시 잘 드러난다. 정주의 상성은 사각형인 성벽의 길이가 사방 4마일에 이르고, 흙을 다져 지은 성벽의 높이는 27피트에 달한다. 운반 가능한 통나무를 가지고 두들겨 기단을 만들면서 층을 쌓아올렸으므로 그것은 시멘트만큼 단단했다. 용산 문화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러한 건축기술은 이후 중국사 전체를 통해서 계속 사용되었다. 3,000년이 지난 후 명조(明朝, 1368-1644)의 수도인 남경과 북경의 성벽 역시 흙을 다져 만든 것이었다. 이들 성벽은 40피트의 높이와 사방 23마일과 21마일에 달하는 훨씬 큰 규모였고 벽돌로 외양을 꾸미기는 했지만 대규모의 노동력을 투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불가사의를 만들기도 했지만 중국의 경우 이러한 관행이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1959년 현재 황하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언사현에 있는 이리두에서 하왕조의 수도라고 추정되는 거대한 왕궁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리두 문화는 하남성 서북부와 산서성 남부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이 문화는 용산 흑도문화를 직접 계승한 것이고 상왕조의 초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데,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하면 기원전 2100년에서 기원전 1800년에 걸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의 최종적인 이 연대추정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삼대 가운데 하왕조와 상왕조도 확실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롱 ㅜ리는 중국의 기원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선 용산문화 시기의 수많은 신석기시대 거주유적에서 삼대의 청동기시대 도성유적으로의 변천과정이 상당히 순탄했던 듯하고, 따라서 이 과정은 단일한 문화유적이 발전해간 계승국면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도구와 무기, 토기와 청동기, 농작물과 가축의 사육, 거주지와 매장지의 건축상의 배치, 종교와 정치상의 명백한 의례행위 등을 살펴보면 고도의 문화적 동질성과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해서 하나의 왕조에서 다음 왕조로 이어졌지만 외부문화에 의한 폭력적인 침략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하, 상, 주는 그 중심지를 각기 달리하면서 공존한 것처럼 보인다(지도 6 참조). 상과 주의 "계승"으로 화북은 고대 중국의 지배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둘째로, 이러한 고대 성벽도시들은 기둥성 있는 다른 지역과의 해상무역이 아니라 정주적이고 토지에 얽매인 농업에 바탕을 둔 왕권을 증명해주고 있다. 안양에서 발견된 자안패(子安貝)는 해안에서 가져온 것이 확실하며, 이것으로 볼 때 신석기시대 동아시아 인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항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2500년으로 추정되는 대만남부의 신석기 유적(대만 남부의 후기 신석기 유적은 연대가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400년이다)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현재 복건성(福建省) 해안에서 100마일이나 떨어진 섬이다. 대륙에서 이어지는 다리모양의 육지도 없었고, 지금보다 수심이 얕았지만 더 쉽게 건널 수 있을 정도의 수심의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해안에 거주하고 있던 신석기인들이 농경에서 발휘한 능력과 맞먹을 정도의 항해기술을 발전시켰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중국에서는 중동지역과 지중해에 비견될 만한 활발한 해상무역을 발달시키지 못했을까? 그 차이는 지리적인 요인에 있었다. 즉 동아시아의 다른 초기 공동체 가운데 연안무역이나 해상무역을 위해서 중국에서 나갈 만한 곳이 거의 없었다. 중국의 해상수송은 양자강 연안, 산동성과 남만주 사이 및 해안을 따라 이루어졌지만, 대양(大洋)무역은 인근에 갈 만한 외국이 없었던 관계로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앙권력의 성장
양소문화와 화북평원 및 황하와 양자강 하류를 따라 분포된 대여섯 군데의 용산문화는 토기의 제작형태로 볼 때 지방문화들이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신석기의 농경취락과 친족조직, 연맹관계 사이의 접촉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서 중앙의 수도에서 보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까지 통치력을 미칠 기회가 주어졌다. 이후의 결과로 판단하건대 대규모 부족에 기원을 둔 씨족이 각기 독자적인 성벽도시를 건립했던 것처럼 보인다. 성의 갑골문에는 모두 1,000개에 달하는 이러한 도시의 이름이 나온다. 씨족장이 다스리는 씨족은 다른 성벽도시에 있던 씨족과 혈연관계를 맺게 되었다. 씨족의 분파도 또한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여 성벽도시를 건설했고, 이에 따라서 지배와 복종이라는 복잡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기원전 3000년 후반에 화북지역에 광범하게 매장되어 있던 광물인 동과주석으로 청동을 주조하는 기술이 넓은 영역에 걸쳐 최초로 중앙권력을 확립하게 된 하왕조와 상왕조 기간 동안 거의 동시에 발생하게 되었다. 청동의 주조는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에서 토기의 모양을 꾸미고 열을 가하거나 칼과 같은 작은 동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기술상의 자연스러운 발달단계로 보인다. 청동 주조기술이 독자적인 것이건 외부에서 수입한 것이건(혹은 두 경우 다이건) 간에 청동의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강대한 권력이 있어야만 광물의 채굴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19세기의 예로 판단하건대 전(前)근대의 광산에서는 손과 무릎을 사용하여 좁과 환기도 되지 않는 갱도에서 무거운 광물 운반차를 끌어내기 위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작업은 노예와 죄수에게나 적합한 것이었다. 청동을 녹여서 틀에 넣고 주조하는 과정에서도 녹인 청동을 처리하고 다룰 수백명의 숙련된 장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의례용 청동기를 만든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왕권이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의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며, 둘째로 왕권이 있었기에 광물의 채굴과 금속의 제련과 같은 힘든 작업에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하왕조나 상왕조의 왕족이 통치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 하나의 연극예술과도 같은 의례, 특히 종종 통치자 자신이 제사장(주술사)이 되어 조상들의 도움과 가호를 받기 위해서 조상신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의례를 행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이 의식에서 주술사는 토템 신앙에서 조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동물의 도움을 받는다. 이 점은 상의 의례용 청동기에 새겨진 동물 무늬, 특히 두 얼굴을 지닌 동물의 얼굴(饕餮 : 고대 청동기상의 무늬 장식으로 도철은 탐욕적인 맹수라고 전해지며, 청동기 위에 도안화된 도철의 얼굴을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역자 주) - 먼훗날의 예를 들면 미국의 토템 깃대에 반영되고 있는 - 에 잘 묘사되어 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각 지역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정당화했다. 일부는 여러 도시를 거느린 제후가 되었으며, 집단끼리 경쟁하고 지역끼리 경쟁하여 마침내 단일한 통치왕조가 특정 지역에서 출현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일단 진행되지 국가권위의 확대는 여전히 청동기 이전의 신석기시대에 머무르고 있던 지역들을 망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청동제 무기는 이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으며, 대략 기원전 1500년 무렵에서 서아시아 정복자들의 무력을 증강시켜주었던, 두 필의 말이 끄는 전차가 약 기원전 1200년 이후인 상대 후기의 정복전쟁에서 사용되었다. 물론 이러한 착상이 중앙아시아를 통해서 전파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강 벗다. 창과 활을 든 보병들이 전차에 동행했다. 전차에는 세 사람이 배치되었는데, 마차를 조종하는 사람이 가운데 있었고, 양 옆에 칼(혹은 창)을 든 사람과 활을 든 사람이 탑승했다. 청동제 도구 때문에 전차는 더욱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군대는 씨족내의 여러 가족에서 충원된 남성들로 형성되었던 것 같다. 수천명의 병사들은 수천명의 죄수로 충원되고, 그들 가운에 수백명이 희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은 자신의 우월한 지위가 개인적인 미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무력이 그를 도왔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정복전쟁 이외에도 하왕조와 상왕조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지배권을 확대시켜갔다. 도시는 상업이나 개별적인 가문의 이주에 의해서 무계획적으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계획하여 만든 것이었다. 농토가 새로 개간되면 왕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선포하고, 도시 주민을 차출하여 공사에 투입하는 것은 전형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시경>에는 마치 미국의 서부 개척자들이 헛간을 짓는 것을 묘사하듯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출전: <時經>, "文王之什"의 "緜"/역자 주).
전체적으로 보면 전쟁과 무역을 통한 통치권의 확대가 조상이나 다른 자연세력과의 교감에서 왕이 누리고 있는 제사와 의례 기능에서의 전반적인 우월성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던 것 같다. 데이비드 케이틀리의 관찰처럼 아마도 프랑스 초기 카롤링거 왕조와 마찬가지로 왕의 넓은 지역에 걸친 순행(巡幸)은 왕이 아직은 완전히 관료화되지 않은 가산국가(家産國家)의 우두머리였고, 그 국가는 제도화된 행동에서 볼 때 세속적이라기보다는 신권적인 국가였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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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중국사, 존 킹 페어뱅크 저, 중국사연구회 번역
http://www.voiceofpeople.org/new/index.html
1920년 무렵에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삼대(三代), 즉 하(夏), 상(商), 주(周)왕조 가운데 오직 주왕조만이 직접적으로 자체적인 역사기록을 통해서 알려져 있었다. 상왕조 때의 30명의 왕이나, 일곱 번이나 바뀐 수도는 주왕조 시절 혹은 그 직후에 편찬된 연대기에 수록되어 있었다. 여러 세기 가 지난 후 송대(宋代)의 금석학자들은 일부에 명문(銘文)이 새겨진 상대(商代)의 청동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899년이 되어서야 학자들은 중국의 한약방에서 고대문자가 새겨진 "용골(龍骨)"을 추적하여 그것들이 하남성 황하 북쪽에 있는 안양(安陽) 부근에서 출토되었음을 확인했다. 1928년에 국립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은 안양에서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에 대한 과학적인 발굴작업을 시작했으며, 이 작업은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50년 이후 초기 상왕조의 수도가 현재의 정주로 밝혀졌다.
상나라 수도의 성 내부에는 흙으로 다진 기단 위에 기둥과 대들보를 세워 지은 왕궁과 지배층의 거주지가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북경 자금성의 기본적인 건축양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안양에서는 수많은 석주를 가진, 시멘트만큼 단단하게 흙으로 다진 건물의 기초가 53개나 발견되었다. 근처에 있는 지하 갱은 창고와 작업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배귀족들은 청동기 주조, 토기제작 및 다른 수공업에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수공업자들을 부리고 있었다. 장인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상대의 청동기는 지금까지도 인류의 위대한 예술적 업적의 하나로 남아 있다. 상왕은 문자를 다루고 갑골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정인(貞人)들의 보좌를 받았다(동물의 어깨뼈에 구멍을 뚫고 열을 가해서 균열을 만든 다음, 조상신의 도움으로 이 균열을 해석하고 그 결과를 뼈에 새겨넣는 식이었다). 이렇게 하여 안양에서 최초로 발견된 저 유명한 "갑골문(卜辭)"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대략 10만 개 가량의 갑골문이 수집되었다. 갑골문에 새겨진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보면 상의 지배귀족들은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나가 싸우기도 하고, 운동을 위해서 사냥을 즐기기도 하고, 제사와 의례를 주관하기도 하는 한편, 기록자(즉 史를 말한다/역자 주)와 장인들을 거느리고서 반수혈식 주거지에 사는 주변 농민들이 경작하는 농작물을 공납받아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상대 사회는 이미 고도로 계층분화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 아래서 물소는 중요한 가축이었으므로 이 수많은 소들이 갑골문을 위한 뼈를 지속적으로 공급했을 것이고, 동물들은 수백마리씩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통치자는 조상신에 대한 숭배를 완전히 의례화된 종교의식의 형태로 표현했다. 지하의 종묘에는 귀중한 물품, 수많은 동물과 인간이 희생으로 매장되었다. 장광직은 이러한 매장풍습을 통해서 은 사회가 하층민들을 때때로 제사의 희생물로 바치는 계층화된 사회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결론지었다. 안양에서 발굴된 유적은 수도 주변의 드넓은 지역 가운데 다만 왕궁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불과할 것이다. 수많은 상대의 유적들이 또한 화북과 사천성 등 다른 지역에서도 발굴되었다.
상왕의 권력은 토목공사를 위한 방대한 노동력의 동원에서도 역시 잘 드러난다. 정주의 상성은 사각형인 성벽의 길이가 사방 4마일에 이르고, 흙을 다져 지은 성벽의 높이는 27피트에 달한다. 운반 가능한 통나무를 가지고 두들겨 기단을 만들면서 층을 쌓아올렸으므로 그것은 시멘트만큼 단단했다. 용산 문화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러한 건축기술은 이후 중국사 전체를 통해서 계속 사용되었다. 3,000년이 지난 후 명조(明朝, 1368-1644)의 수도인 남경과 북경의 성벽 역시 흙을 다져 만든 것이었다. 이들 성벽은 40피트의 높이와 사방 23마일과 21마일에 달하는 훨씬 큰 규모였고 벽돌로 외양을 꾸미기는 했지만 대규모의 노동력을 투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불가사의를 만들기도 했지만 중국의 경우 이러한 관행이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1959년 현재 황하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언사현에 있는 이리두에서 하왕조의 수도라고 추정되는 거대한 왕궁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리두 문화는 하남성 서북부와 산서성 남부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이 문화는 용산 흑도문화를 직접 계승한 것이고 상왕조의 초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데,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하면 기원전 2100년에서 기원전 1800년에 걸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의 최종적인 이 연대추정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삼대 가운데 하왕조와 상왕조도 확실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롱 ㅜ리는 중국의 기원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선 용산문화 시기의 수많은 신석기시대 거주유적에서 삼대의 청동기시대 도성유적으로의 변천과정이 상당히 순탄했던 듯하고, 따라서 이 과정은 단일한 문화유적이 발전해간 계승국면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도구와 무기, 토기와 청동기, 농작물과 가축의 사육, 거주지와 매장지의 건축상의 배치, 종교와 정치상의 명백한 의례행위 등을 살펴보면 고도의 문화적 동질성과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해서 하나의 왕조에서 다음 왕조로 이어졌지만 외부문화에 의한 폭력적인 침략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하, 상, 주는 그 중심지를 각기 달리하면서 공존한 것처럼 보인다(지도 6 참조). 상과 주의 "계승"으로 화북은 고대 중국의 지배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둘째로, 이러한 고대 성벽도시들은 기둥성 있는 다른 지역과의 해상무역이 아니라 정주적이고 토지에 얽매인 농업에 바탕을 둔 왕권을 증명해주고 있다. 안양에서 발견된 자안패(子安貝)는 해안에서 가져온 것이 확실하며, 이것으로 볼 때 신석기시대 동아시아 인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항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2500년으로 추정되는 대만남부의 신석기 유적(대만 남부의 후기 신석기 유적은 연대가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400년이다)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현재 복건성(福建省) 해안에서 100마일이나 떨어진 섬이다. 대륙에서 이어지는 다리모양의 육지도 없었고, 지금보다 수심이 얕았지만 더 쉽게 건널 수 있을 정도의 수심의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해안에 거주하고 있던 신석기인들이 농경에서 발휘한 능력과 맞먹을 정도의 항해기술을 발전시켰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중국에서는 중동지역과 지중해에 비견될 만한 활발한 해상무역을 발달시키지 못했을까? 그 차이는 지리적인 요인에 있었다. 즉 동아시아의 다른 초기 공동체 가운데 연안무역이나 해상무역을 위해서 중국에서 나갈 만한 곳이 거의 없었다. 중국의 해상수송은 양자강 연안, 산동성과 남만주 사이 및 해안을 따라 이루어졌지만, 대양(大洋)무역은 인근에 갈 만한 외국이 없었던 관계로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앙권력의 성장
양소문화와 화북평원 및 황하와 양자강 하류를 따라 분포된 대여섯 군데의 용산문화는 토기의 제작형태로 볼 때 지방문화들이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신석기의 농경취락과 친족조직, 연맹관계 사이의 접촉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서 중앙의 수도에서 보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까지 통치력을 미칠 기회가 주어졌다. 이후의 결과로 판단하건대 대규모 부족에 기원을 둔 씨족이 각기 독자적인 성벽도시를 건립했던 것처럼 보인다. 성의 갑골문에는 모두 1,000개에 달하는 이러한 도시의 이름이 나온다. 씨족장이 다스리는 씨족은 다른 성벽도시에 있던 씨족과 혈연관계를 맺게 되었다. 씨족의 분파도 또한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여 성벽도시를 건설했고, 이에 따라서 지배와 복종이라는 복잡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기원전 3000년 후반에 화북지역에 광범하게 매장되어 있던 광물인 동과주석으로 청동을 주조하는 기술이 넓은 영역에 걸쳐 최초로 중앙권력을 확립하게 된 하왕조와 상왕조 기간 동안 거의 동시에 발생하게 되었다. 청동의 주조는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에서 토기의 모양을 꾸미고 열을 가하거나 칼과 같은 작은 동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기술상의 자연스러운 발달단계로 보인다. 청동 주조기술이 독자적인 것이건 외부에서 수입한 것이건(혹은 두 경우 다이건) 간에 청동의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강대한 권력이 있어야만 광물의 채굴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19세기의 예로 판단하건대 전(前)근대의 광산에서는 손과 무릎을 사용하여 좁과 환기도 되지 않는 갱도에서 무거운 광물 운반차를 끌어내기 위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작업은 노예와 죄수에게나 적합한 것이었다. 청동을 녹여서 틀에 넣고 주조하는 과정에서도 녹인 청동을 처리하고 다룰 수백명의 숙련된 장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의례용 청동기를 만든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왕권이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의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며, 둘째로 왕권이 있었기에 광물의 채굴과 금속의 제련과 같은 힘든 작업에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하왕조나 상왕조의 왕족이 통치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 하나의 연극예술과도 같은 의례, 특히 종종 통치자 자신이 제사장(주술사)이 되어 조상들의 도움과 가호를 받기 위해서 조상신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의례를 행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이 의식에서 주술사는 토템 신앙에서 조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동물의 도움을 받는다. 이 점은 상의 의례용 청동기에 새겨진 동물 무늬, 특히 두 얼굴을 지닌 동물의 얼굴(饕餮 : 고대 청동기상의 무늬 장식으로 도철은 탐욕적인 맹수라고 전해지며, 청동기 위에 도안화된 도철의 얼굴을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역자 주) - 먼훗날의 예를 들면 미국의 토템 깃대에 반영되고 있는 - 에 잘 묘사되어 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각 지역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정당화했다. 일부는 여러 도시를 거느린 제후가 되었으며, 집단끼리 경쟁하고 지역끼리 경쟁하여 마침내 단일한 통치왕조가 특정 지역에서 출현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일단 진행되지 국가권위의 확대는 여전히 청동기 이전의 신석기시대에 머무르고 있던 지역들을 망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청동제 무기는 이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으며, 대략 기원전 1500년 무렵에서 서아시아 정복자들의 무력을 증강시켜주었던, 두 필의 말이 끄는 전차가 약 기원전 1200년 이후인 상대 후기의 정복전쟁에서 사용되었다. 물론 이러한 착상이 중앙아시아를 통해서 전파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강 벗다. 창과 활을 든 보병들이 전차에 동행했다. 전차에는 세 사람이 배치되었는데, 마차를 조종하는 사람이 가운데 있었고, 양 옆에 칼(혹은 창)을 든 사람과 활을 든 사람이 탑승했다. 청동제 도구 때문에 전차는 더욱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군대는 씨족내의 여러 가족에서 충원된 남성들로 형성되었던 것 같다. 수천명의 병사들은 수천명의 죄수로 충원되고, 그들 가운에 수백명이 희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은 자신의 우월한 지위가 개인적인 미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무력이 그를 도왔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정복전쟁 이외에도 하왕조와 상왕조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지배권을 확대시켜갔다. 도시는 상업이나 개별적인 가문의 이주에 의해서 무계획적으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계획하여 만든 것이었다. 농토가 새로 개간되면 왕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선포하고, 도시 주민을 차출하여 공사에 투입하는 것은 전형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시경>에는 마치 미국의 서부 개척자들이 헛간을 짓는 것을 묘사하듯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출전: <時經>, "文王之什"의 "緜"/역자 주).
전체적으로 보면 전쟁과 무역을 통한 통치권의 확대가 조상이나 다른 자연세력과의 교감에서 왕이 누리고 있는 제사와 의례 기능에서의 전반적인 우월성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던 것 같다. 데이비드 케이틀리의 관찰처럼 아마도 프랑스 초기 카롤링거 왕조와 마찬가지로 왕의 넓은 지역에 걸친 순행(巡幸)은 왕이 아직은 완전히 관료화되지 않은 가산국가(家産國家)의 우두머리였고, 그 국가는 제도화된 행동에서 볼 때 세속적이라기보다는 신권적인 국가였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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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중국사, 존 킹 페어뱅크 저, 중국사연구회 번역
http://www.voiceofpeople.org/new/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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